한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학생들이 자주 멈춰 서는 단어가 있어요. 뜻은 사전에 분명히 적혀 있는데, 자기 나라 말로 옮기려고 하면 딱 맞는 자리가 없는 말들이요.
"'섭섭하다'는 영어로 뭐예요?"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자주 묻는 질문
사전과 번역기는 보통 'disappointed'를 내놓아요. 그런데 그 답을 듣고 나면 학생들이 한 번 더 물어요. "그럼 화난 거예요?" 아니거든요. '섭섭하다'는 화보다 훨씬 여린 마음이라서요.
사전이 말하는 '섭섭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섭섭하다'의 뜻이 여러 갈래로 실려 있어요. 그중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건 크게 두 가지예요.
예: "벌써 가신다니 섭섭하네요."
예: "연락 한 통 없어서 좀 섭섭했어요."
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에서는 '서운하다'와 '섭섭하다'가 뜻이 비슷하지만 문맥에 따라 달리 쓰인다고 안내해요. '서운하다'가 마음에 모자람이 남은 쪽이라면, '섭섭하다'는 기대가 어긋나 불만스러운 마음까지 조금 더 실린 쪽이라는 설명이 있어요.
왜 번역이 잘 안 될까
영어 'disappointed'는 보통 일이나 결과를 향해요. 시험 점수에 실망하고, 영화에 실망해요. 그런데 '섭섭하다'는 거의 언제나 사람을 향해요. "영화가 섭섭했어요"라고는 하지 않잖아요.
게다가 이 마음은 아무에게나 생기지 않아요. 길에서 스친 사람한테는 섭섭할 수가 없어요. 뭔가를 기대할 만큼 가까운 사이여야 비로소 생기는 감정이거든요. "친구한테 섭섭했다"는 말 안에는 이미 "나는 그 친구에게 기대가 있었다"가 들어 있는 셈이에요. 그러니 'disappointed' 한 단어로 옮기면, 그 관계의 무게가 통째로 빠져나가요.
'시원섭섭하다'라는 한 단어
'섭섭하다'가 가장 재미있어지는 순간은 '시원하다'와 붙을 때예요. 졸업식, 이사 가는 날, 오래 붙들고 있던 일을 끝낸 날에 우리는 "시원섭섭하다"고 말해요. 홀가분한데 아쉽고, 아쉬운데 후련한 마음이 한 단어 안에 같이 들어 있어요.
영어로는 'bittersweet'가 가까운 자리에 있지만, 이쪽은 '쓴맛과 단맛'이라는 맛의 비유예요. 우리말은 '시원함과 섭섭함'이라는 몸과 마음의 감각을 붙였고요. 같은 복잡한 심정을 두 언어가 서로 다른 감각으로 붙잡은 거예요.
'disappointed'로만 알려주면 감정의 세기가 너무 강해져요. 'a bit disappointed'처럼 정도를 낮춰 짚어 주고, 무엇보다 '누구에게 섭섭하다'처럼 대상이 사람인 문장으로 연습시키면 훨씬 빨리 감을 잡아요. "동생한테 섭섭했어요", "말을 안 해 줘서 섭섭해요" 같은 문장이요.
누군가 나에게 "섭섭했어"라고 말했다면, 사실 그건 서운함만 담긴 말이 아니에요. 나를 기대해도 되는 자리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 최근에 '시원섭섭'했던 순간이 있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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